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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대륙 이름의 유래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아니었다?

루시ñ 2025. 4. 29. 10:08

우리가 지금 "아메리카 대륙"이라고 부르는 땅. 이 거대한 대륙은 왜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배우지만, 대륙의 이름은 콜럼버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그 주인공이 바로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다.

그렇다면 왜 콜럼버스가 아니라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이 신대륙에 남게 된 걸까? 지금부터 그 흥미진진한 과정을 살펴보자.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누구인가?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454년 3월 9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당시 피렌체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고, 과학, 예술, 지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베스푸치 역시 젊은 시절부터 수학, 천문학, 항해술 등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별과 하늘을 통해 방향을 읽는 법을 익혔다.

그는 원래 탐험가라기보다는 상인이었다. 피렌체의 유력한 메디치 가문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를 통해 스페인 세비야로 건너가 무역 관련 업무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항해사들과 교류하면서 신대륙 탐험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항해

베스푸치는 1497년부터 1504년까지 여러 차례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했다. 특히 1499년과 1501년의 항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1499년 항해: 스페인 국왕의 후원을 받아 알론소 데 오헤다(Alonso de Ojeda)와 함께 남아메리카 북부 해안을 탐험했다. 지금의 베네수엘라 지역을 지나면서 "작은 베네치아"(Venezuela)라는 이름도 이때 붙여졌다.
  • 1501~1502년 항해: 포르투갈의 후원을 받아 브라질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탐험을 이어갔다. 이때 베스푸치는 광대한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면서, 이 지역이 단순한 섬이 아니라 엄청나게 큰 육지, 즉 하나의 "신세계" 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도달한 곳이 아시아의 일부라고 끝까지 믿었던 반면, 베스푸치는 이곳이 "아시아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대륙"이라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한 인물이었다. 이 점이 결정적으로 그의 이름이 남게 되는 이유가 된다.

 

신세계(New World)라는 개념

베스푸치는 탐험을 마친 후, 자신이 본 것들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편지를 썼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신세계에 관하여(Mundus Novus)》라는 제목의 편지다. 이 편지는 유럽 전역에 퍼지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자신이 본 땅은 아시아가 아니다.
  • 이곳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땅이다.
  • 따라서 이 지역은 "새로운 세계(Mundus Novus)"라고 불러야 한다.

이 선언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알려진 세 개의 대륙(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외에 또 다른 대륙이 있다는 사실은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라는 이름의 탄생

1507년,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Martin Waldseemüller)는 "우주의 서문(Cosmographiae Introductio)"이라는 책을 출판한다. 이 책은 세계 지리와 신세계에 대한 최신 정보를 담은 교양서였다.

발트제뮐러는 이 책에서 베스푸치의 《신세계에 관하여》를 바탕으로, 새로 발견된 땅을 이렇게 부른다.

"이 새로운 대륙은 Amerigo라는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America)라고 부르자."

그는 자신이 제작한 세계지도에도 남아메리카 대륙을 "AMERICA" 라고 표기했다. 발트제뮐러는 아메리고 베스푸치를 "신대륙 발견자"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 지도는 매우 인기가 있었고,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다. 결국,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신대륙 전체를 '아메리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왜 이름을 남기지 못했나?

그렇다면 왜 콜럼버스는 대륙의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콜럼버스는 끝까지 자신이 도달한 곳이 아시아라고 믿었다.
    새로운 대륙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라는 개념을 주장할 수 없었다.
  2. 베스푸치는 "신대륙"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정의했다.
    이 점이 지도 제작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시기적인 문제
    발트제뮐러가 지도를 만들던 1507년은 콜럼버스가 사망한(1506년) 직후였다. 콜럼버스에 대한 명예 회복은 훨씬 나중에 이루어졌다. 당시로서는 베스푸치가 더 "신세계의 대표자"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

물론 나중에 스페인은 콜럼버스를 높이 기리게 되었지만, 이미 '아메리카'라는 이름은 전 세계에 널리 퍼진 뒤였다.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최후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후에 스페인 정부에 의해 세비야 항만의 최고 항해사(파일럿 총감, piloto mayor) 로 임명된다. 그는 신대륙으로 가는 항로를 관리하고 새로운 지도 제작을 감독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512년 2월 22일, 그는 세비야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대륙 중 하나에 영원히 남게 될 줄은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대한 평가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위대한 항해가였지만, 탐험의 진정한 발견자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편지 내용이 과장되었다고 보고, 일부 항해 기록이 진짜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베스푸치가 신대륙을 "새로운 세계"로 인식하고 이를 널리 알렸다는 점이다. 그 업적이 대륙의 이름으로 남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그의 발언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