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신대륙 항해에 성공한 후, 스페인 왕실로부터 거대한 특권을 약속받았다. 그는 신대륙에서 발견하는 모든 땅의 총독이 되고, 거기서 발생하는 수익의 일정 부분을 영구적으로 받는 조건이었다. 이 계약은 산타 페 계약(Santa Fe Capitulations) 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현실은 약속과 달랐다. 콜럼버스가 죽은 후, 그의 후손들은 스페인 왕실과 오랜 기간 동안 치열한 법정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 일련의 소송을 "콜럼버스 재판(Pleitos Colombinos)" 이라고 부른다.
그럼 이 재판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산타 페 계약과 콜럼버스의 권리
1492년 4월,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과 다음과 같은 조건에 합의했다.
- 발견한 모든 땅의 "제독(Admiral)", "부왕(Viceroy)", "총독(Governor)"의 칭호 부여
- 향후 발견되는 지역의 무역 및 세금 수입의 10%를 받을 권리
- 새로운 직위와 재산은 자손들에게 세습
이 조건들은 콜럼버스에게 엄청난 부와 권력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 계약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콜럼버스 가문은 아메리카 대륙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는 거대한 귀족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콜럼버스의 몰락과 갈등의 시작
하지만 콜럼버스는 현실 정치에 능하지 못했다. 신대륙에서의 통치는 실패와 갈등의 연속이었다. 특히, 히스파니올라 섬(현재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콜럼버스 형제들의 가혹한 통치에 대해 많은 불만이 제기되었다.
결국, 1500년 스페인 왕실은 콜럼버스를 총독직에서 해임하고 스페인으로 소환한다. 그는 수갑을 차고 돌아왔지만, 왕과 여왕은 그를 죽이지 않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가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은 사실상 박탈되었다.
콜럼버스는 1506년, 실질적인 권력과 영지를 회복하지 못한 채 쓸쓸히 사망했다.
후손들의 분노와 소송
콜럼버스 사후, 그의 장남인 디에고 콜럼버스(Diego Colón) 는 부친에게 약속된 권리와 직위를 회복하기 위해 왕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1508년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어 수십 년간 지속된다.
디에고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 산타 페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 신대륙에서 부왕과 총독의 지위를 자신이 계승해야 한다.
- 무역 수익의 10%를 가족이 계속 받아야 한다.
스페인 왕실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왕실 입장에서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민간 가문에게 넘긴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재판의 진행과 주요 사건
콜럼버스 재판은 복잡하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주요 흐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508년 재판 개시
디에고 콜럼버스가 정식으로 소송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콜럼버스 가문이 강력한 주장을 펼쳤다. - 1511년 부분 승소
디에고는 신대륙 일부 지역의 부왕(Viceroy) 및 총독(Governor) 직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는 제한적이었고, 전체 대륙에 대한 권리는 아니었다. - 1520년 디에고 콜럼버스 사망
디에고는 재판이 끝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미망인과 자녀들이 소송을 이어갔다. - 1530년대 이후 확대된 소송
콜럼버스의 손자 루이스 콜럼버스(Luis Colón) 가 소송을 계속 이어갔다. 루이스는 스페인 왕실과 일정한 합의에 도달한다.
최종 합의
1541년, 콜럼버스의 손자 루이스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실과 최종 합의에 도달한다. 주요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루이스는 후작(Marqués de Jamaica) 와 공작(Duque de Veragua) 의 칭호를 부여받는다.
- 루이스는 자메이카 섬 일부 지역과 베라과(Veragua, 현재 파나마 서부 지역) 의 상당 부분을 영지로 받는다.
-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대한 통치권이나 무역 세금 10% 권리는 포기한다.
즉, 콜럼버스 가문은 일부 귀족 지위와 재산을 얻었지만, 최초 산타 페 계약에 비해 크게 축소된 권리만을 인정받게 되었다.
결국, 콜럼버스 재판은 콜럼버스 가문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할 수도 있었던 가능성을 스페인 왕실이 강제로 억누른 결과로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콜럼버스 재판이 남긴 의미
콜럼버스 재판은 단순한 개인 소송을 넘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왕권 강화
신대륙은 민간 귀족 가문이 아닌 왕실 직할령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 식민지 경영 체계 확립
이후 스페인은 인디아스 회의소(Consejo de Indias)와 같은 공식 기관을 통해 식민지를 중앙 통제하기 시작했다. - 계약 정치의 한계
대항해시대 초기에 성립한 개인과 국가 간의 계약이, 국가 이익 앞에서는 쉽게 무시될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 콜럼버스의 역사적 평가
콜럼버스 가문의 이런 끈질긴 싸움은 콜럼버스 개인의 위대함을 역사에 남기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미숙함과 현실과의 괴리를 드러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