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해적과 스페인과의 전쟁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지중해 지역에서 벌어진 군사적, 해상적 충돌의 중요한 일면이었다. 이 갈등은 단순한 해적과 국가 간의 대립을 넘어, 오스만 제국과 스페인 제국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패권 다툼,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종교 전쟁, 그리고 유럽 열강의 식민지 확장 전략이 복합적으로 얽힌 양상을 띠었다.
1. 배경: 지중해의 해상 질서와 해적의 부상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스페인은 레콩키스타(이슬람 세력의 이베리아 반도 축출)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해양 제국이었다. 한편 북아프리카 해안, 특히 알제리·튀니지·트리폴리(현재의 리비아) 등은 오스만 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고, 이 지역에서는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으로 불리는 이슬람계 해적들이 활개를 쳤다.
이 해적들은 단순한 약탈 집단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반국가적 해양 세력으로 기능했다. 이들은 스페인 및 다른 유럽 국가의 무역선을 습격하고, 해안 도시를 약탈하며, 유럽인들을 노예로 잡아 북아프리카로 끌고 가 팔기도 했다. 해적의 본거지인 알제리·튀니지·트리폴리는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속령으로서, 오스만 함대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2. 해적과 오스만의 연계
바르바리 해적의 대표적 인물은 '하이레딘 바르바로사'였다. 그는 원래 그리스 태생의 해적이었지만, 점차 세력을 키워 알제리를 장악하고 오스만 제국에 귀순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이 되었다. 바르바로사는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연합 함대를 격파하며 지중해 패권에서 오스만 제국의 우위를 확립했다. 이러한 전개는 단순한 해적 활동이 아닌, 제국 간의 해상 전쟁이라는 큰 틀 안에서 해적이 전략적 도구로 활용된 것을 보여준다.
3. 스페인의 대응
스페인은 지중해 무역의 안정을 위해 바르바리 해적 근거지를 수차례 공격했다. 가장 유명한 작전은 1571년의 레판토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은 베네치아, 교황령 등과 함께 '신성 동맹 함대'를 결성해 오스만 제국 해군을 격파했다. 이는 기독교 세계의 대승으로 여겨졌으며, 오스만의 지중해 확장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지는 못했다. 오스만 제국과 그 하부 해적 세력은 여전히 북아프리카 해안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후에도 유럽 해안 도시와 선박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스페인은 이러한 해적 위협에 맞서며 지속적으로 해군을 동원해야 했고,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4. 전쟁의 양상과 결과
스페인과 바르바리 해적, 오스만 제국 간의 충돌은 대규모 해전뿐만 아니라, 간헐적인 기습, 해안 약탈, 노예 사냥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특히 지중해 연안의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남부 지역은 해적들의 습격에 취약했으며, 수천 명의 민간인이 납치되거나 살해당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과 유럽 여러 국가는 해안 요새를 건설하고, 무장 상선을 운용하는 등 방어 체계를 강화했다.
18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고 유럽 해군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은 점차 약화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종식은 아니었으며, 미국과의 전쟁(제1차 바르바리 전쟁, 1801–1805)이나 영국 해군의 제압(1816년 알제 폭격) 등이 이들 해적 세력의 몰락을 가져왔다.
5. 의의와 평가
지중해 해적과 스페인 간의 전쟁은 단순한 ‘범죄자 소탕전’이 아니라, 당시 국제 정치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스페인과 오스만의 해상 패권 경쟁,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문명 충돌, 제국주의적 확장 전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 전쟁은 유럽 해군의 발전을 자극했고, 해상 교통의 안전 문제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과적으로 해적 행위를 국제법상 범죄로 규정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