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세고비아와 똘레도의 음식 역사 이야기

by 루시ñ 2025. 5. 30.

🍷 스페인 전통음식의 뿌리를 찾아서

스페인을 여행하다 보면 단순한 관광지 이상의 감동을 주는 도시들이 있다. 바로 세고비아똘레도다. 이 두 도시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그 속에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전통 음식들이 사람들의 입과 기억을 사로잡고 있다.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시대와 사람, 문화의 기억이다. 지금부터는 세고비아와 똘레도의 대표적인 전통음식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전해왔는지를 들여다보자.

 


 

🏰 세고비아 – 왕의 도시에서 태어난 소박한 미식

 

1. 코치니요 아사도 (Cochinillo Asado)

세고비아의 대표 음식인 **코치니요 아사도(어린 돼지 통구이)**는 중세 왕정시대부터 이어져 온 카스티야 지방의 육식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13~15세기, 세고비아는 카스티야 왕국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여러 왕들이 이 지역을 궁정 혹은 사냥터로 사용했다. 왕과 귀족들은 사냥과 식사를 중시했으며, 특히 어린 동물을 구워 먹는 요리는 부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코치니요 아사도는 단지 귀족의 음식만은 아니었다. 농가에서는 출산한 어미 돼지의 새끼 중 일부를 일찍 도축해 가정용 식사로 활용했고, 그것이 지역 식문화로 정착했다. 고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장작불로 천천히 구워내는 전통은 오랜 경험과 기술이 필요한 방식이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세고비아 전통 요리사들에게 세대 간 전수되고 있다.

 

2. 유디아스 콘 차로 (Judiones con Chorizo)

이 전통 콩 스튜는 **18세기 왕실 정원인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La Granja de San Ildefonso)'**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이 지역의 수녀원과 농장에서 재배하던 **커다란 하얀 콩(Judión)**은 고산지대에서도 잘 자라는 품종이었고, 서민 식탁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초리소와 돼지고기를 넣어 만든 스튜는 농민들에게는 한 끼 식사였고, 수도원에서는 신에게 드리는 음식으로도 쓰였다. 특히 종교적인 금욕주의가 강했던 시기에도 콩은 채식으로 간주되어 중요한 식자재가 되었다. 콩을 불리고 고기와 함께 푹 끓이는 방식은 오늘날 스페인의 다른 지역 전통 요리와도 유사하지만, 세고비아판은 유독 고소하고 진한 맛으로 사랑받는다.

 


 

🏰 똘레도 – 문명이 교차하던 도시의 다문화 요리

 

똘레도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공존했던 도시다. 이른바 “세 개의 문화의 도시(Ciudad de las Tres Culturas)”라는 별칭처럼, 이곳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함께 살며 독특한 음식문화를 형성했다. 똘레도의 전통음식들은 그런 문화적 융합의 결과물이다.

 

1. 사슴고기 스튜 (Estofado de Venado)

똘레도 근방은 중세시대부터 왕실의 사냥터로 유명했다. 특히 카를로스 5세와 펠리페 2세 같은 군주들이 이 지역에서 귀족 사냥을 즐기며 사슴, 멧돼지, 토끼 등 야생동물 요리를 궁중 요리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초기에는 귀족들의 음식이었을 뿐, 일반인에게는 접하기 어려운 고기였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 귀족들이 쇠퇴하고 왕실의 권력이 마드리드로 옮겨가자, 이러한 귀족 요리법들이 대중으로 전파되었다.
사슴고기를 레드 와인과 허브, 양파, 마늘 등으로 오랜 시간 조리하는 이 스튜는 와인 생산지와 가깝다는 지역적 특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마르소 판도 (Mazapán de Toledo)

이 전통 디저트는 똘레도 음식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마르소 판도는 아랍-무슬림 영향 아래 있던 8~11세기경 똘레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슬람 제과 문화에는 아몬드와 설탕을 활용한 디저트가 많았고, 그 영향을 받은 수녀원에서 아몬드 반죽으로 다양한 형태의 간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13세기 기독교 왕국의 수복 후에도 이 요리는 지역 전통으로 남아, 주로 수녀원에서 생산되어 판매되었다. 지금도 똘레도 시내의 유명 제과점 중 다수는 수녀원과 연계되어 있으며, 제조법 또한 중세 레시피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특히 많이 먹지만, 똘레도에서는 연중 생산되고 기념품으로도 인기가 높다.

 

3. 아호(Sopa de Ajo)

스페인 내륙 지역에서는 **마늘 수프(Sopa de Ajo)**가 매우 대중적이다. 이 요리는 16세기 이후 스페인 농민 계층의 대표적인 절약 요리로 자리 잡았다. 똘레도에서는 오래된 빵, 마늘, 파프리카, 물, 그리고 종종 달걀을 넣어 만든 이 수프가 검소하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서민의 음식으로 전해졌다.

특히 금욕주의가 강조되던 사순절 기간에는 고기를 삼가는 대신 이 마늘 수프가 자주 먹혔고, 수도원과 성당 인근에서 널리 퍼졌다. 똘레도 지역의 수프는 특히 빵을 국물에 담가 푹 끓인 점성이 특징적이며, 이는 단순한 식사가 아닌 가난과 인내의 미학으로도 여겨진다.

 


 

🍷 마무리하며: 음식이 말해주는 도시의 역사

 

세고비아와 똘레도의 전통음식은 단순한 맛 그 이상이다. 그것은 과거 왕과 귀족이 머물던 시대의 흔적이자, 종교적 금욕과 관용의 문화가 녹아든 결과다. 코치니요 아사도 한 접시에는 세고비아의 화덕 장인의 손길이 담겨 있고, 마르소 판도의 달콤함 뒤에는 수백 년을 이어온 다문화의 역사가 흐른다.

스페인을 여행한다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그 지역의 음식을 통해 역사를 음미해 보는 경험을 꼭 해보시길 바란다. 음식은 그 도시가 살아온 이야기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가장 감각적인 통로이기 때문이다.